이번엔 2회의 부제 중 '반성문'쪽. 덕임의 끝도 없는 반성문 굴레의 이야기다

큰 죄를 지었는데 반성문만 써오라기에 오예, 했더니 군주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정 힘들면 자기 집으로 오라는 군주들ㅋㅋㅋㅋㅋㅋㅋㅋ

군주는 세자의 적녀, 즉 세자와 정실 부인인 세자빈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가리키는 말로(왕의 적녀는 공주, 서녀는 옹주)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는 2남 2녀가 있었는데 그중 첫아들인 의소는 어렸을 때 죽고 현재 세손(훗날의 정조)과 세손의 두 여동생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있다. 군주와 함께 의빈성씨가 필사한 소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덕임은 이들 군주와도 꽤나 가까웠던 사이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오라버니의 깐깐한 성격을 잘 아는 군주들은 덕임을 걱정하고, 덕임은 그나마 가장 세손의 심기가 편한 날을 찾아 (뺑뺑이를 돈 끝에) 반성문을 들고 찾아간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아, 선택이란 걸 하며 살고 싶어"

그전에 덕임의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의빈성씨가 정조를 공식적으로(?) 두번 찼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면, 정조가 당당히 기록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역피셜에서도 잠시 얘기했지만, 의빈성씨는 감히 궁녀가 왕의 승은을 거절한 전후무후한 여자였다.

사실 저 시대의 궁녀란, 세손이 드라마에서 계속 말하듯이, 굉장히 '하찮은 존재'였다. 덕임은 중인 출신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궁녀는 천인들 중에 뽑는 비천한 신분이었고, 왕이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그런 존재였다. 기본적으로 입궁 후에 모두 왕의 여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왕이 승은을 내리면 어익후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아들여야지 거절하니 마니는 아예 선택지에 없다.

그런데도 덕임은 승은을 거부했다. 것도 두 번이나. 정조는 첫번째 승은을 거둘 때 덕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기다려 주었다. 15년 동안이나. (그러나 의빈이 죽고 정조가 쓴 글에 '후궁의 반열에 둔 지 20년이다'라는 부분을 보면, 거절당하고도 덕임을 자신의 여자라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덕임이 승은을 거부한 이유는, 정조가 싫어서라기보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쪽이 더 컸다. 처음 승은을 내리려고 했을 때 정도 15살, 덕임은 14살이었다.... 뭐 그 당시 나이로 보면 충분히 혼인하여 가정을 꾸릴 나이이긴 한데

문제는, 정조 15살때는 세손이었고(24세에 즉위함), 세손의 정적들이 날을 시퍼렇게 세우고 세손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고, 세손빈이 아이를 낳지 못했고(역사적으로 효의왕후와 덕임은 굉장히 가까운 사이여서 덕임이 죽고 효의왕후가 많이 슬퍼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상식으로 왕실의 문제를 보면 안 됨...) 등의 이유로 정조를 거절한 것이다.

두번째 승은을 내릴 때 상황도 비슷했다. 왕후는 여전히 아이를 낳지 못했고(사실 정조와 정비 효의왕후는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데면데면하게 그저 정중한 사이였음), 왕이 나이가 서른인데도 후사가 없는 막중한 상황인지라 왕실이 난리가 난 상태였다. 대비인 정순왕후가 후사를 보려고 간택후궁인 화빈을 뽑아들이기로 한 상황에서(정조는 계속 싫다고 말을 했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었음. 왕조시대에 왕의 후계자가 없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위기 상황이기에) 두번째 승은을 내리려고 했으니 덕임으로서는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화빈이 하도 질투를 해서 멀리 떼어 놓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화빈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빡칠만한 것이다...)

당시 덕임은 이미 서른이 다 되었고, 지금도 빠른 나이가 아니니 당시로서는 아이를 낳으리란 기대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서른이면, 손주를 볼 수도 있는 나이) 정조는 그냥, 자신이 직접 제문과 비문과 묘표에 남겼듯, '사랑해서' 덕임을 기다렸고 덕임과 가정을 꾸리길 소망한 것이다.

이 모든 정황을 보건데, 덕임은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나름 주체적인 여성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왕의 승은을 두번이나 거절할 정도로(정조와 충분한 교감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자신의 생각이나 결정이 단단한 사람이었다.

다시 반성문으로 돌아와

#1차 반성문

덕임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신경 1도 안쓰고 일하고 있던 세손, 덕임의 반성문의 필체를 보고 덕임임을 알아챈다.

뭐야, 너였어?

깐깐한 세손이 저도 모르게 짓는 미소에 어리둥절한 좌익위와 내관ㅋㅋㅋㅋㅋㅋㅋ 아차, 그러고보니 쟤가 내 얼굴 보면 안 됨 급히 흠흠, 소리로 발을 내리게 하고 반성문을 보니

엉망진창이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부러 벌을 내리려는 의도 없어도 걍 엉망진창이라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첫줄이 틀렸다, 다음줄도, 다음줄도 하던 내관 목소리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왕에게만 올리는 산호인 천세까지 다 들어있는 난장판ㅋㅋㅋㅋㅋㅋㅋㅋ

#2차 반성문

반성문 쓰라고 했던 사람한테서 직접 첨삭지도를 받고 이제는 됐겠지 기대하며 반성문을 올렸는데

응 아니야 이번에도 틀렸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괴롭히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못썼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덕임이 괴롭히시면서 좀 즐기시는 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빗자루로 쫓겨나고 소금 맞은 복수를 조금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는 거냐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

#3차 반성문

이번에도 불통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덕임이 이제 빡치기 시작한다. 밤을 새서 열심히 써갔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4차 반성문

들어올 때부터 이미 불경한 덕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연속 반성문 퇴짜 크리에 빡칠대로 빡쳤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납작 엎드려 있긴 하나 눈빛이 몹시 불경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저 기가 막힌 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는 틀린 글자를 손수 첨삭지도해 줌

그러나 백번 써와야 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 두고보라지 않았느냐

몹시 상쾌해 보이십니다 세손 저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쯤 되면, 산이 굳이 덕임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고 계속 덕임의 무례한 행동을 반성문 퇴짜 정도로 봐주고 있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아마 산의 평생 자신에게 덕임처럼 함부로 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날 함부로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그런데 그게 처음엔 황당하고 어이없었을지라도 편안하고 익숙해지면서 좋았던 것 같다. 덕임과의 시간이 유일한 안식처처럼 보였다고나 할까(좀 거친 안식처구려)

그러니 서고의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날락하며 덕임과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처음엔 세작(=스파이)을 찾으러 그 다음에는 호랑이 관련 자료를 찾으러 가긴 했으나... 사실 덕임이는 세작이 아닌 것을 이미 알았고, 호랑이 관련 자료는 그 낡은 서고가 아니라 다른 서고에 더 많았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굳이 그 서고에 간 이유. 그 서고가 산이 팽팽한 긴장감을 내려놓고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계속 덕임을 속인 것 같다. 자신이 세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덕임이 자신을 더이상 편하게 대하지 않(못)을 테니까.

#5차 반성문

반성문 꾸미기, 반꾸까지 해서 갔는데도 빠꾸 먹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 요것 봐라 하는 산ㅋㅋㅋㅋㅋㅋㅋㅋ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으면서 뉘우친 척 한 죄에 대한 새로운 반성문을 써오라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관도 몹시 지친듯하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국 반성문 결말은 이렇게 났는데, 새로 반성문을 써 간 걸까ㅋㅋㅋㅋㅋㅋㅋ호랑이 사냥 후 정체가 들통나며 그냥 흐지부지된 것 같기도 하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을 읽지 말라 번까지 서게 해놓고 찾아가

"책을 읽어다오.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라고 '부탁'하는 산. 호랑이 사냥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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