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지금 드라마에 꽂히면 안 되는데, 시작 전부터 뭔가 꽂힐 기미(?)가 보였던 드라마에 결국 꽂히고 말았다. <옷소매 붉은 끝동>... 사실 원작은 내 취향이 아니어서 드라마화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제작진이 역피셜을 많이 반영한다고 하여, 아니 이럼 이야기가 다르지 하고 시작하게 되었다.

 

 

원작 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이 나올 때에는 정조의 의빈 사랑이 오피셜화(?) 되기 전이어서 나중에 원작가가 역피셜을 알고 많이 아쉬워했다고, 그래서 드라마에는 역피셜을 많이 반영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역피셜 자체가 드라마 그 자체다. 

 

의빈성씨(1753 - 1786). 성가 덕임. 성은 성씨요, 이름은 덕임.

 

우리가 으리으리한 집안에서 간택되어 들어간 후궁도 아니고 일개 승은후궁(임금이 승은을 내려 된 후궁)의 이름과 출생, 일대기를 세세하게 알 수 있는 건, 바로 정조의 집착에 가까운 기록 때문이다. 정조는 자신의 절절한 마음을 담아,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아볼 수 없는 파격을 행하며 이 사랑하는 여자에 관해 기록을 남겼고, 덕분에 우리는 정조가 그 여인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그 여인을 얻기 위해 무려 15년을 기다리고 두 번 차였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다. 

 

역피셜로 알아본 의빈 성씨의 생애.

 

의빈의 신분은 중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궁녀는 천민에서만 뽑아 들이기로 법적으로 정해 놓았으나 후기에 이르면 자신이 직접 양인 출신이나 가까운 지인의 딸 등을 궁녀로 뽑아 옆에 두었던 기록이 있고, 궁녀는 그 시대 보기 드문 전문직 여성(월급이 따박따박 나오고 휴가도 있고 죽을 때까지 몸만 성하면 일할 수 있음)인지라 궁으로 밀어 보내는 양인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의빈은 정조의 친모인 혜경궁 홍씨 집안의 청지기의 딸로, 혜경궁이 직접 길렀다고 한다. 10세 전후로 궁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혜경궁의 두터운 사랑을 받았다. 정조의 표현에 의하면 의빈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하다. 성품부터 재주까지, 미모부터 능력까지 두루두루 갖춘 그야말로 엄친딸인데 정조의 콩깍지(?)를 감안하더라도 임금의 승은을 두 번이나 거절할 배짱까지 있는 아무튼 대단한 여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정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종 다음으로 좋아하는 왕으로, 그 우여곡절 많은 인생 때문에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정조의 비극은 숙종 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숙종과 장희빈, 인현왕후의 삼각관계에서 이 모든 일이 시작된다. 장희빈은 숙종에게 첫 아들인 경종을 안겨주었으나 투기 어쩌고 저쩌고, 저주 어쩌고 저쩌고...라기보다 장희빈으로 대변되는 남인과 인현왕후로 대변되는 서인의 싸움에서 패하면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종은 화려한 여성 편력에 비해 아들이 귀했는데(조선 후기로 가면서 자손이 귀해진다) 그나마 숙종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살아남은' 아들은 경종과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 금 뿐이었다.

 

경종은 몸이 약하고 후사가 없었으니 연잉군이 왕세제(弟)가 되었는데, 연잉군의 어머니가 바로 그 유명한,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다. (궁녀들의 시중을 들던 비자- 즉 종의 아들) 출신에 대한 컴플렉스(심지어 숙종의 친자가 아니었다는 소문까지 돌았으니) 때문이었는지, 영조는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성정의 인간이었다. 변덕이 죽 끓듯 했고 미워하고 사랑함의 정도가 극과 극이었다.(어쩌면 숙종을 닮은 건지도...) 

 

문제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조의 미움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영조는 나이 마흔 넘어 얻은 귀한 아들을 처음에는 엄청 사랑했으나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자 미워하기 시작, 나중에는 사도세자를 만나고 나면 귀를 씻어버릴 정도로 아들을 싫어했다. 드라마 1회에 나오지만, 영조는 사도세자가 어긋나자 사도세자의 아들 산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아들을 직접 죽인다. (그 유명한 임오화변-뒤주에 세자를 가두어 죽인 일)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 - 가 여기서 나온다. 영조는 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죽은 자신의 첫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법적 입적을 시켰으나 엄연히 친모인 혜경궁 홍씨가 살아 있고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이들은 연산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정조가 왕이 되지 못하도록 온갖 훼방을 놓았고 암살 시도도 한다. (무려 실록에 기록된 사실) 그 모든 개인적인 그리고 공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조는 우리가 아는 성군이 된다. (그리하여 온갖 영정조 치세를 완성하여 시험의 단골 문제가... 쿨럭... 아님미다...)

 

정조는 여자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듯 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린 시절 꽂힌 첫사랑 덕임 말고는 다른 여자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 듯 하다. 정조가 덕임에게 처음으로 차인 게 15세 때... 이때 덕임은 울면서 아직 세손빈이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 자신이 감히 그 명을 받을 수 없다며 울며 거절했다고 한다. 두번째는 정조의 간택후궁인 화빈이 들어올 때쯤인데.

 

덕임 입장에서는 정조가 진짜 미치고 팔딱 뛸 타이밍에 자꾸만 승은을 내리겠다고 한 걸수도... 있다. 15세 때의 정조는 말해 뭐해... 그때는 세손이었고, 영조는 아침 저녁 기분이 다른 지랄맞은 인간이어서 끊임없이 세손을 시험에 들게 했고 더구나 아버지 사도세자가 여러 궁녀를 건드려 자식들을 본(3남 1녀를 후궁에게서 얻음) 사실을 영조가 얼마나 싫어했는데, 세손빈을 젖히고 먼저 아들이라도 낳으면 사실상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행을 이어가는 셈이 되니.

 

근데, 저 시대에 아랫사람은, 특히 궁녀는, 왕이 내리는 승은을 거절할 위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위치의 사람이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인데, 그런데도 승은을 거절했고 정조는 알았다고 하고 기다린다. 무려 15년을!

두번째 승은을 내리려 했을 때는 화빈이 간택되어 궁에 들어왔을 때인데, 그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서른이 넘도록 정조는 자식이 없는 상태였고 간택 후궁이 막 궁에 들어왔고, 덕임이는 지금도 살짝 늦은 나이인 서른이어서 후사를 볼 가능성도 낮았는데 임금이 다른 여자는 거들떠도 안 보고 오직 자신에게만 꽂혀 있으니 입장이 굉장히 난처했을 것이다. (화빈이 난리를 치고 투기를 부릴 만 했...)

 

정조는 첫번째 거절 후에도 의빈을 그냥 자기 여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직접 쓴 글에 의빈을 후궁의 반열에 둔 지 20년이라는 말이 나온다...(실제로 의빈이 후궁으로 산 건 6년 정도니까) 

 

어쨌든 두번째는 받아들이고 그 후로 6년 동안 다섯 번의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였으니... 심지어 정조는 의빈의 처소에서 경연까지 열었을 정도(실록에 기록됨...)이니 그냥 의빈의 처소에서 살았다고 보면 된다. 두 번의 유산은 이재난고에만 기록되어 있어 아니라쳐도 세 번은 확실하다. 문효세자, 옹주, 그리고 뱃속의 아이.

 

문효세자가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조선 후기는 좀 달라졌을까. 정조 사후에도 어른이었을 테고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영특했다고 정조가 사방팔방 자랑했다니(우리 애 똑똑하지 않니 첫 자랑이 세자 한 살때였...) 뭔가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슬픈 가정. 그러나 비극은 정조와 의빈을 덮친다. 옹주는 태어난지 두 달만에 죽고, 문효세자도 다섯 살에 홍역으로 사망한다. 문효세자가 죽은 지 다섯 달 만에 만삭이던 의빈이 죽는다. 오늘날로 치면 임신중독증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는데, 그 당시에는 멀쩡하던 사람이 이유도 없이 죽은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독살 의혹까지 있었다고 한다. 

 

독살 의혹은 정조가 직접 부인하면서 일단락된다. 의빈이 죽기 전까지 정조가 '직접' 약을 일일이 살피고 먹는 것과 잠자는 것, 씻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극진히 간호를 했기에 그럴 리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 후로 정조는, 워커홀릭이 되어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업적을 이루어낸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 정조, 《어제비문》
사랑하는 빈의 불행한 운명은 위에 적힌 사실과 같다.''
- 정조, 《어제의빈묘표》#
"빈(의빈)을 후정(후궁)의 반열에 둔지 지금까지 20년이다."
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而亦哀予之不能忘哀也" 
- 정조, 《어제의빈치제제문》#
"살아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我思矣千古之訣"
- 정조,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전송하는 내 마음을 누가 갖고 나가서 애모를 표하겠는가. 내가 생각하노니 영원토록 이별하는구나."
"我送以文疇其相紼云我思矣千古之訣" 
- 정조,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출처가 나무위키이긴 한데, 정조가 직접 쓴 것들이 맞다)

 

이후 정조는... 순조가 태어나기 두 달 전에도 의빈의 사당에서 밤을 샐 정도로 의빈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데 전념을 다한다. 온갖 파격적인 행보가 뒤따른다. 저렇게 절절하게 고백하는 제왕의 기록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다. 아마 그냥 남자와 여자로 만났다면 뒤따라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슬퍼했다. 혜경궁도 정조가 의빈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여 슬퍼하니 몸을 해칠까 전전긍긍했다고 한중록에 기록했다.

 

나는 왕이어서 죽을 수도 없다. 이처럼 슬픈 말이 있을까. 왕이기에 어쨌든 다른 여자에게서라도 후사를 보아야 하고 왕이기에 의빈만 생각할 수 없다. 그걸 알기에 의빈은 죽기 전 제발 효의왕후의 침전에도 자주 거둥하여 후사를 꼭 보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정조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고 답했는데... ㅠㅠㅠㅠㅠㅠㅠ

 

의빈과 문효세자를 궁 지척에 두고(이것도 엄청난 파격) 하도 보러 다녀서 오늘날 효창공원 인근에는 거둥고개라는 곳이 있다. (임금이 하도 거둥을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정조가 쓴 글들을 보면 구구절절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픈 곳이 많다. 슬프고 한스럽고 애타는 마음이 끓어넘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보고 싶은지, 얼마나 그리운지, 얼마나...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을 알고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 이건 결국 비극일 수밖에 없으나... 

 

순간은 영원이 되었다.

 

원작 소설의 저 마지막 문장이 이 두 사람을 말해주는 것 같다. 정조는 결국 의빈을 후손들이 기억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정조의 원앤온리가 의빈이었음을, 이 두사람의 사랑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드라마를 본다... 아... 4회밖에 안 했는데 눈앞이 캄캄해... 난 이 드라마가 끝날때까지 잡혀 있을 것 같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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